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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행 :: 2011/02/14 08:08



좌린이 일찍 퇴근한 어느날 저녁
해람이 목에 보자기를 두르고 머리카락을 잘라 주었다.
지난 십여년간 단 한번도 꺼낸적이 없었던 바리깡을 들고 조심조심...
해람이도 최근에 미용실에서 엄마, 아빠, 누나가 머리 자르는 모습을 봐서일까, 왱~하는 기계음에 놀라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몸에 닿는 느낌이 간지럽다고 키득키득 기분좋게 웃고 있었다.
아들의 머리카락을 손수 잘라주는 것, 해 보고 싶었던 거야.
보자기의 머리카락을 털어내며 좌린이, 약간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아빠가 이발사가 되고 아루가 조수가 되어 해람이 머리카락을 자르는 사이에 나는 부엌에서 돼지고기를 튀기고 있었다.
아이들이 탕수육을 좋아해서, 돼지고기를 한 번에 많이 튀겨서 냉동실에 넣어 두고 조금씩 꺼내 먹곤 하는데
얼마전에 사둔 닭가슴살까지 모두 튀겨내다보니 다른 때보다 양이 많았다.
한 시간 꼬박 가스레인지 앞에 붙어서서 튀김을 하고나니 온 몸에서 기름 냄새가 진동을 했다.
다 튀겨놓고 튀김에 맥주 한잔 하려고 했으나 냄새에 질려 먹고 싶은 생각이 싹 달아나 버렸다.
내 몸에 배인 기름 냄새 속에서 퍼뜩 어린시절 엄마 냄새가 떠올랐다.
명절, 제사때마다 음식을 도맡아 했던 엄마, 하루 종일 지짐을 부치고 음식을 만드느라 지친 엄마에게서 맡았던 냄새...
그와 함께 어린 시절 엄마가 직접 만들어 주셨던 도너츠, 계란빵, 카스테라 등이 떠올랐다.
돼지고기를 튀겨서 도시락 반찬으로 싸 주시곤 했는데 지금 내가, 어린 시절 엄마가 우리에게 해 주신 것처럼 그렇게 우리 아이들에게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니 피식 웃음이 났다.
스무살에는 아니, 첫 아이 아루를 낳을 때까지도 단 한번도 상상하지 못했던 모습으로 내가 살아가고 있구나.
어릴 때부터 여성도 경제활동을 하면서(돈을 벌면서) 자신의 능력을 펼쳐야 한다고 교육 받았고 전근대적이고 무능력한 여성의 표상인 전업 주부로 사는 것은 생각할 가치조차 없는 일이었는데...
어느 밤샘 술자리에서 주민등록 말소하고 혼자 어딘가에 숨어서 살겠다던 이십대 중반의 좌린 역시 아들의 머리카락을 자르며 아버지의 로망이야,라고 말하게 될 줄 상상이나 했을까.
부아앙~ 비행기를 타고 더운 나라로 여행을 간다는 이야기에 한껏 들뜬 아이들이 늦게 잠이 들고 여행 짐 리스트를 적으며 새로 만든 해람이 여권을 보면서 우리도 무척 신이 났다.
회사를 그만 두고 아이들을 키우기로 한 것은 잘한 선택이었다.
물론 두 가지 병행할 수 있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했고 회사에서 돈을 버는 것보다 아이들과 함께 지내는 것이 내겐 훨씬 중요하니까...
하지만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아이들과 집안일에 나누어 쓰다보면 나 혼자 무언가에 몰두할 수 있는 시간이 늘 아쉽고 일주일에 이틀이상 자정에 퇴근하는 좌린을 보면 안쓰럽지만 불만스럽기도 했다.
같이 길을 간다는 것은, 같이 걸을 누군가가 있다는 것은 마음에 큰 위로가 된다.
같이 가기 위해서 때로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참고 기다려야 하고 상대방의 빠른 걸음에 맞추어야 할 때도 있으며 같이 걸으면서도 때로는 혼자라는 착각과 외로움을 느끼기도 하고 내 멋대로 하고 싶은 유혹에 빠져들기도 하지만...
서로를 믿고 함께 나아가는 한 걸음 한 걸음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오랜만에 떠나는 여행을 앞두고 내가 가고 있는 길, 우리가 함께 가는 길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다.



1월 29일 토요일 아침, 마닐라.
어두운 방 파아란 커텐 사이로 햇빛이 들어온다.
피부에 닿는 공기가 덥지만 끈적이지 않아 좋다.
불과 열 두시간전까지 영하 십도의 추위 속에 있었다는 사실, 징그럽게 춥고 지루했던 지난 겨울을 떠올리자 배시시 웃음이 났다. 드디어 왔구나!
막판에 항공권이 잘못된 것을 알고 지난 이틀동안 얼마나 정신없이 보냈는지, 지난밤 비행기를 타기 불과 몇시간 전까지 이 비행기를 탈 수 있을 지 몰라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이제 그딴 것은 모두 서울의 추위와 함께 과거의 시간이 되어 버렸다.
아이들은 공항에서 비행기를 보면서부터 몹시 들뜨고 즐거워했고 늦은밤 기내식도 뚝딱 해치웠다.
한밤중에 내린 낯선 곳에서 낯선 공기, 낯선 사람들을 마주하고 해람이는 울음을 터뜨리기도 했지만 엄마 품에서 곧 안정을 찾았다.
오늘은 어디서 잘까...잘 곳을 정하지 않고 낯선 도시에 내린 것이 참 오랜만이다.
새벽 한 시, 어디로 가야할지 아직 모르지만 새로운 경험에 대한 기대와 설레임으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픽업나온 차들을 타고 여러무리의 사람들이 바쁘게 사라지는 동안 우리는 느긋하게 공항 벤치에 앉아 옷을 갈아입고 겨울 옷을 가방에 쑤셔 넣었다.
좌린이 담배를 피우는 사이에 경찰이 다가와 좋은 호텔이 있다며 호객행위를 한다. 경험상 경찰 제복이라든지, 정부가 인정한 가이드 푯말 같은 것이 결코 믿을만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가격이라도 알아두려고 귀담아 들었다.
한국 여행사 직원으로 보이는 사람에게 공항근처의 호텔을 물어서 택시를 탔다.
행선지를 미리 말하고 미터 택시를 탔지만 역시나 택시 기사는 우리가 가자고 하는 호텔을 모른단다.
비행기에서 좌린 옆자리에 앉았던 아저씨에게 받은 호텔 지도가 있어서 그리로 가자고 했더니 공항에서 너무 멀어서 내일 다시 공항으로 오는데 불편하다며 자기가 아는 호텔을 소개해주겠단다.
여행을 하면서 이런 일을 겪을 때 나는 종종 분통을 터뜨리곤 했다. 얄팍한 상술에 속아 넘어가는 것이 불쾌하기도 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가장 큰 원인은 잘 모르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던 같다.
이제는 이런 상황에서 어느정도 느긋해질 수 있게됐다. 공항에서 멀리가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고, 다른 선택이 없으니 택시 기사를 따라가기로 했다. 머릿속으로 아까 경찰이 이야기한 호텔의 가격과 택시 기사에게 줄 팁을 생각하면서...
처음 간 곳에는 빈 방이 없었고 한밤중인데도 북적거리는 홍등가와 술집들이 늘어선 거리를 지나 오래되고 낡았지만 제법 큰 호텔에 방을 잡았다.
더블 침대 두 개를 붙여 넷이 나란히 누웠다.
가슴이 두근거려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는데 어느 순간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좌린과 비니의 새로운 동행, 아루와 해람.
아루가 두돌이 되기전에 발리를 다녀왔는데 그때와 비교할 수 없게 아루는 씩씩하고 활기차다.
두 돌이 갓지난 해람이는 누나가 있어서 얼마나 좋은지! 누나가 있어서 그런지 낯선 환경에 쉽게 적응하는 듯하다.






호텔에서 내려다본 골목길
여행이 즐거운 것은 낯선 공기, 낯선 풍경, 낯선 냄새, 새로운 맛... 오감이 깨어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해주기 때문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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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herenow | 2011/02/14 16:51 | PERMALINK | EDIT/DEL | REPLY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비니님.

    아이들과 함께 한 여행 이야기, 사진도 좋고 글도 좋네요.
    제가 경험하지 못하는 세계를 비니님 블로그를 통해 살짝 엿보고 가요. ^^

    • beany | 2011/02/16 03:17 | PERMALINK | EDIT/DEL

      herenow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저도 herenow님 이야기 들으러 블로그에 놀러갈께요.
      (가끔 생각이 났는데 이제야 링크에 올렸어요^^)

  • 김태민 | 2011/03/02 00:57 | PERMALINK | EDIT/DEL | REPLY

    오랜만에 들려요. 한 1년 만에 온 것 같네요.
    잘 지내고 있으세요? 한밭고 후배 김태민 입니다.
    써 놓으신 길에 대한 글을 읽다가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네요.

    "같이 길을 간다는 것은, 같이 걸을 누군가가 있다는 것은 마음에 큰 위로가 된다.
    같이 가기 위해서 때로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참고 기다려야 하고 상대방의 빠른 걸음에 맞추어야 할 때도 있으며 같이 걸으면서도 때로는 혼자라는 착각과 외로움을 느끼기도 하고 내 멋대로 하고 싶은 유혹에 빠져들기도 하지만... 서로를 믿고 함께 나아가는 한 걸음 한 걸음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길이라는 단어만 생각하면 왜이리 눈물이 나는 지. 작년에 다녔던 제주도 올레길이 떠오르며 그리움에 젖어 봅니다.
    그리고 가끔은 참고 기다려주지 못했던
    내 모습이 바보같이만 느껴지네요. 난 왜 그리 욕심도 많고 못다한 것도 많은 건지.
    어쩔땐 말이죠 어떤 게 욕심이고 어떤 게 열정인지 헷갈려요.
    욕심이면 버리면 되는데 열정이면 불살라야 하는 거쟎아요. 무리해서라도.
    사진에서 보는 아이 키우는 모습이 너무너무 당차고 훌륭해 보입니다.
    저도 4달 있으면 곧 아빠가 되는 데 잘 해낼 수 있을 지 걱정이네요.
    종종 들어와서 예쁜 사진 좋은 글 볼테니 무한업데 부탁드립니다.
    건강하고 행복하게 지내시길 바라며.

    태민 from Florida

    • beany | 2011/03/09 16:39 | PERMALINK | EDIT/DEL

      태민아, 오랜만에 소식 전해주어 정말 반갑고 고맙다.
      네 글을 읽다보니 모든 일에 적극적이었던 예전의 네 모습이 떠오르네.
      여전히 열심히 살고 있구나.
      넉달 후에 아빠가 된다니 축하해.
      걱정하지마, 좋은 아빠가 될테니!
      그래, 종종 들러서 소식 전해주고
      멀리서 너야말로 건강하고 행복하게 지내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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