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방콕, 더운 날 물어 물어 찾아간 인도인 거리, 식당에서 라씨 마시고 한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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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ro
032로 시작하는 낯선 전화번호의 주인공은 중학교 때 단짝 친구였다. 3년간 같은 반이었고 거의 날마다 괴정동과 가장동 일대를 함께 쏘다녔다. 한민 쇼핑센터에서 쫄면을 사먹으며 이웃 고등학교 학생들의 서툰 연애 행각을 비웃어주곤 했다. 이마에 한창 여드름이 났던 십대의 중반, 딱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마음 한 가득 이상이 있었고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소설가가 되고 싶었다가 별을 연구하는 천문학도가 되고 싶었다가 또 어느 날은 공학도가 되겠다는 말도 했었다. 서울로 유학을 가서 멋진 대학생이 되는 것, ‘사랑이 꽃피는 나무’ 드라마에서처럼 싱그러운 대학생활을 하는 것, 그것은 가장 구체적인 꿈이었다. 고등학교도 같은 학교를 다녔지만 그전처럼 가까이 지내지는 못했고 졸업 이후로는 소식이 거의 끊겼었다. 서먹함을 무릅쓰고 그녀에게 전화를 건 것은 결혼 무렵. 소설가, 공학도의 꿈도, 밤하늘 올려다보던 기억도 잊은 지 오래, 서울 생활에 대한 기대와 대학 캠퍼스의 환상이 깨진 것도 이미 오래 전의 일이었다. 결혼식에 와줄래? 아파트 평수와 대출 이자 따위로 머리가 복잡할 때 문득 세상 두려운 줄 모르고 세상에서 제일 잘난 여자애들이었던 우리의 모습이 떠올랐다.
홈페이지 눈 동냥으로 근황을 겨우 윤곽만 알고 있는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별로 없었지만, 그래, 그렇구나, 맞장구치고 행간의 의미를 착착 알아줄 만큼의 디테일을 공유하지 못했지만, 답답하고 속상할 때 내게 전화를 걸어 준 것이 살짝 흥분될 만큼 기분 좋은 것이었다. 가슴이 답답해서 이야기할 사람을 찾다가 내 생각이 났다고, 좌린과 나의 사는 모습이 찌들어 보이지 않아 그랬노라고…… 현실의 남루함이 마음을 죄어올 때, 그 친구도 충청도 어딘가에서의 우주 소년단 캠프를 떠올렸을 지 모른다. 천체 망원경으로 처음 별을 보았던 그 날.
나, 기열이 형 회사에 나가기로 했어.
그로부터 몇 일 후 좌린은 여행때 메고 다니던 작은 배낭과 등산화를 슬며시 꺼내 놓았다. 나 역시 몇군데 입사 지원서를 내고 면접을 보러 다니고 있었는데 면접관들에게 나의 능력을 잘 포장하여 보여주는 것보다 그들의 모습에서 내 미래를 상상하는 것이 더 괴로운 일이었다. 삶에 어떤 로망도 가지지 못한 자의 얼굴과 말투,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 안달하고 다른 가치는 폄하해 버리는 편협함. 다시 회사를 나가야겠다고 결심했을 때 이미 생각했던 것이지만, 그래도 괜찮다고, 왜냐면, 나는 그들과 똑같이 되지는 않을 테니까, 무기력하지도 그렇다고 영악하고 탐욕스럽지도 않을 테니까, 하지만 마음 한구석 참 허허로웠다.
여행의 기억이란 환영처럼 불현듯 찾아와 비현실적인 감상에 빠뜨리곤 한다. 도도하고 빛나던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것처럼 두둥실 몸과 마음이 무중력 상태에 떠오르는 듯한 느낌. 아득하고 그리운 감정.
하아린, 당신 출근하기 전에 여행 한 번 다녀올까?
그래!
그의 대답을 기다리는데 0.0001초
앙코르 왓을 갈까, 베트남 북부를 갈까 결정하는 데 잠깐
인터넷으로 비행기표를 발권하는데 몇 분.
새 여권을 기다리는 5일이 너무나 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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