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 여행 잡지의 특집 기사에 좌린과 비니의 이야기가 한 꼭지 실리게 되어 참으로 머쓱하고 민망한, (좌린 용어로 '민지러운') 스튜디오 촬영을 했.다.
사진 찍히느라 남의 옷을 입은 것은 결혼식 이후 처음.
오늘의 촬영을 위해 좌린은 덥수룩 자란 수염도 깎지 않았고, 인도에서 산 바지에 군용 스키 파카를 입고 'Somh'님 협찬의 조각 천으로 만든 스카프로 한껏 멋을 내었건만,
주최측이 준비한 의상이 있었으니,
빽 바지에 꽃무늬 샤쓰~^^
흰 바지에 꽃무늬 셔츠를 입은 좌린과 하늘하늘 날개처럼 얇고 가벼운 꽃무늬 원피스에 분홍색 샌들을 신은 비니에게 주어진 미션은
모로코 유치장에서의 경험을 재현하는 것.
모로코에서의 그 첫날 밤, 영문도 모른 채 유치장에 잡혀간 억울하고 암담했던 그 사건을 꽃무늬 셔츠에 꽃무늬 원피스를 입고 재현하라니.
하지만 기대 이상의 강도 높은 '색다른' 경험에 아주 유쾌하고 즐거웠다.
심각한 표정을 지어야 하는데 서로 낄낄거리느라 정신을 수습하기 힘들었음. (남 흉내내기 잘하고 노래방에서는 모창도 곧 잘 하는 좌린이라 능청맞게 연기를 할거라고 생각했는데, 흐흐흐, 저 뻘쭘한 표정과 어색한 모습에 아주 배꼽을 잡았다. 내가 좀 놀렸더니 '어, 어어린 왕자 같지 않어?' -_-;;;;)
more..
그날 밤은 참, 암담했는데, 그 어둡고 똥 냄새 나는 방, 푹 꺼진 매트리스에 누워 '지금이야 지옥 같지만 시간이 지나면 별 일 아닌 일이 될 수도 있고, 더 나중에는 오늘 경험을 이야기하며 웃을 날도 있겠지' 라며 스스로를 달랬었는데,
정말, 이제는 술자리에서의 무용담이 되었고 꽃무늬 의상을 입고 낄낄거리며 떠올리는 에피소드가 되었구나...
촬영을 마치고 카메라 수리를 위해 남대문에 들렀다.
좌린의 300D는 얼마 전 미러 박스에 제법 큰 부상을 입었는데 여행 중 독일에서 구입한지라 건강보험증이 없어 LG 캐논 센터에 가지 못하고 남대문 시장 모처에서 야매 시술을 받게 되었다.
카메라를 맡기고 시장 구경을 하다 보니, 이런 저런 기억이 떠오른다.
결혼 준비로 그릇을 보러 와서 토토로 컵을 산 일, (연애 초기 좌린이 한 달간 중국 출장을 가면서 내가 심심 할까봐 일본 애니메이션을 CD로 구워 주고 갔는데 ‘이웃집 토토로’와 ‘그 남자 그 여자의 사정’을 참 여러 번 보았다.) 여행 가기 전 변색 렌즈로 안경을 맞추고 신이 났던 일, 사진 크기에 꼭 맞는 포장 비닐을 구하러 발 품을 팔았던 일, 새해 맞이 콘서트를 보고 남대문 포장마차에서 새해 아침을 맞았던 기억……
좌린이 술안주 납품 회사의 홈페이지를 만드는 일을 할 때 퇴근 길에 다양한 안주 꾸러미를 챙겨오곤 했는데 그 중에서 와사비 과자는 나의 훼이보릿이었다. 맞아, 맞아, 우리 그때는 그랬었는데…… 반가운 마음에 와사비 과자 한 봉지 샀다.
이렇게 같이 꺼내보고 조잘조잘 떠들 수 있는 에피소드들을 하나씩 만들어 가는 것, 그 것이 함께 사는 삶의 재미가 아닐까.
인터뷰하는 사람들은 하나 같이 여행을 결심한 동기가 뭐냐, 여행을 다녀오니 뭐가 달라졌냐고 묻는데 우리는 애써 우리가 비장한 용기로 ‘전세금을 털어’, 혹은 ‘전 재산을 털어’ 여행을 결심한 것이 아니며, 남들보다 조금 길게 여행을 했다고 해서 큰 깨달음을 얻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곤 한다. (기사는 우리의 의도와 다르게 나가곤 하지만……-_-;;;)
사실 출발 전에 한가지 환상을 품긴 했는데 일 년 이상 둘이 붙어 다니면 서로에 대해 도 통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서로에 대해 잘 알게 되면 눈빛만 봐도 그냥 통하고 싸울 일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러나 일년 넘게, 지금 거의 이년 간 붙어 다닌 결과, 우리는 여전히 티격태격 다투고, 나는 좌린이 내게 묻지도 않고 마지막 남은 피자 한 조각을 잽싸게 먹어버리는 것이 아직도 서운하다.
여행의 좋은 점은 상대적으로 ‘기~인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것. 408일 동안 그토록 오랜 시간을 여행 했다고 생각했는데 돌아와 보니, 변한 것이 너무 없어 기분이 참 이상했다. 물리적으로는 일 년이지만 십 년의 세월을 보낸 느낌.
상대적으로 긴 시간을 살며 많은 이야기 거리를 만들었으니 여행을 참 잘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호호호, 꽃무늬 샤쓰에 꽃무늬 원피스를 입고 스튜디오 촬영을! 미래의 어느 날, 오늘의 기억을 떠올리며 키득키득 웃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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