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스페인어를 배우죠?"
DELE 시험의 마지막 관문, 말하기 시험에서 감독관이 물었다.
말하기 시험에서 가장 흔히 물어보는 질문으로 "여행을 좋아하고 다른 문화에 관심이 많아서"라고 미리 준비한 대답을 했지만 글쎄...
스페인어를, 다른 언어도 아닌 스페인어를 공부하는 구체적인 이유나 목적이 있는 건 아니다.
더군다나 지금 당장, 임신 8개월의 무거운 몸을 이끌고 대구까지 내려가서 시험을 꼭 봐야 하는 절실한 이유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아루랑 함께하는 것 말고 나만을 위해서 무엇이든 해 보자, 하루에 단 한 시간이라도 다른 무언가에 집중해보자는 생각을 했었고 스페인어가 다른 언어(영어, 중국어, 일본어)에 비해 실용적인 목적이 적어 마음 편하게 재미삼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중에 아이들을 데리고 중남미를 다시 여행할 때 엄마의 멋진 스페인어 실력을 뽐내리라, 뭐 이런 상상을 하기도 하면서...
다음까페에서 알게 된 소규모 스터디에 석 달 동안 아루를 데리고 다녔고(작년 이맘때, 아루님이 걷기 전이라 옆에 앉혀두고 수업을 듣는 것이 어느 정도 가능했었다) 집에서 멕시코 친구로부터 개인지도도 몇 달 받았고 두어달 동안 금요일 저녁마다 좌린에게 아루를 맡기고 혼자 수업을 다니기도 했다.(수업보다도 금요일 저녁 부산한 신촌 거리를 활보하는 것이 즐거웠다~)
듣기와 말하기는 생각보다 무난했고 문법은 예상대로 어려웠고
쉬운 주제였는데도 시간이 부족해서 작문을 다 못 쓴 것이 아쉽긴 하지만
일 년 공부하고 시험까지 치고나니 괜히 뿌듯하다.
결과에 상관없이...!?(석달 후 쯤 결과가 나온다는데 작문을 너무 못해서 합격은 못할 것 같다-_-;;;)
사실은 '조금 더 잘 할 수 있었는데...' 아쉬움이 들기도 하지만
'학원에서 시험 준비반 수업을 들은 것도 아니고 혼자서 이 정도 했으면 잘한거야.'라고 다독이고 계심.
시험이 끝나고 나니 마음이 너무나 홀가분하다.
마침 더위도 한풀 꺾여 좀 살 것 같고...!
한동안 처박아 두었던 카메라를 꺼내 들었다. (그러고보니 너무 오랫동안 사진을 안 찍었군.)

지난 주 목요일 아루랑 서울 대공원에 갔을 때 홍학을 유심히 보았다.
몸이 어찌나 길고 유연한 지, 살아있는 생명이라기보다 자유자재로 구부리고 펼 수 있는 인공 물질처럼 보였다.
인공으로 만든 호수와 숲을 배경으로 강렬한 주황색 깃털이 도드라져 더더욱 비현실적으로 보였던 것 같다.
한참 바라보면서 유연하고 우아한 움직임에 감탄하다가
불현듯, 뜬금없이(!)
콩쥐(둘째의 태명)가 나올 때가 다가오고 있다는 생각이 났다.
무더위에 헉헉 거리느라 시험 준비하느라 아루랑 노느라 솔직이 뱃 속의 아기에게 신경을 못 쓰고 있었다.
아루 때는 임신 중기부터 수영과 요가를 했는데(그래서인지 아루는 초산인데도 쉽게 낳을 수 있었다!)
이번에는 아무 것도 못하고 벌써 8개월이 되어 버렸다.
아루 때는 나름 운동을 열심히 해서 그리고 처음이라 오히려 두려움이 없었는데
요즘엔 아이 낳을 생각을 하면 마음이 조금 심란하다.
"원래 초행길은 멋모르고 가는 것이고 두번째 갈 때 가장 길게 느껴지는 법이야. 그러다 세번째, 네번째 되면 쉬워지지." 언제나 그렇듯 좌린의 비유는 그럴싸하게 들린다.
세 번째, 네 번째까지 경험하고 싶은 생각은 없고
어쨌든 두 달 남은 동안 열심히 복근 운동하고 새 식구 맞을 준비를 해야겠다.
콩쥐야, 마음 많이 못 써줘서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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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린은 그리 자상하고 살뜰한 남편은 아니다.
하지만 내가 무엇을 하고자 할 때 세상 어디에도 이만큼 든든한 후원자는 없다.
당장 쓸모있는 공부도 아닌데 단 한 번도 하찮게 여긴 적이 없었고
내가 수업을 들을 수 있도록 어떻게든 시간을 내려고 노력했고
시험을 앞두고 자신없어 할 때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시험을 대구에서 보게되어 하루 전에 거창에 내려가 자고 새벽 일찍 집을 나왔다.
몇 일 전부터 아루에게 자고 일어났을 때 엄마가 없을 거라고, 저녁 때 돌아올 것이라고 이야기를 해 두었다.
만 28개월, 사실 지금까지 아루 옆에 엄마나 아빠가 없었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모두 지방에 계셔서 자주 만나지 못하고, 두돌까지도 아루가 낯을 많이 가려서 다른 사람들에게 선뜻 다가가지 않았다.
조금 걱정이 들기도 했지만 아루에게 엄마의 상황을 이야기했을 때 아루가 충분히 이해하고 잘 할 거라는 믿음이 들었다.
잠투정을 조금 하긴 했지만
"엄마는 시험 보러 갔지"
"기다리면 엄마가 온대"
내가 했던 말을 되뇌이며 할아버지 할머니와 잘 지냈다고 한다.
엄마 아빠없이 하루 종일 지내는 것이 쉽지 않았을텐데 내 말을 믿고 기다려준 아루님이 대견하다.
요즘들어 부쩍 아루가 많이 컸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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